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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 뒤 이라크에서 직장인 생활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죠”-연세대 감독 시절 ‘호랑이 감독’ 불려. “제자들을 최고선수로 키워야하는 의무 있었다”“”감독 임무는 훈련장에서 끝난다. 실전에선 실수 나와도 박수 쳐야“-“연세대 전성 시절에도 ‘다음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란 생각으로 늘 불안”-“아마추어 감독과 프로 감독은 달랐다. 프로에서 3년 정도 코치 경력 쌓았으면 어땠을까” 

최희암 부회장은 농구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1993-1994시즌 농구대잔치 우승을 꼽는다(사진=엠스플뉴스)
최희암 부회장은 농구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1993-1994시즌 농구대잔치 우승을 꼽는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퇴계로] KBL(한국프로농구) 출범 이전인 1994년. 한국 농구 최고의 팀을 가리는 농구대잔치에서 정상에 오른 팀이 있다. 실업의 강호를 물리치고 대망의 우승컵을 안은 주인공은 연세대학교였다. 대학팀이 농구대잔치 정상에 오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연세대는 1997, 1998년에도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다. 농구계는 이때를 ‘한국 농구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를 이끈 이가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이다. 최 부회장은 1986년 연세대 지휘봉을 잡고 무려 17년간 팀을 이끌었다.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 당대 최고의 스타가 최 부회장의 지도로 탄생했다.  2002년 정든 연세대를 떠나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전신), 동국대,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지휘봉을 잡은 최 부회장은 2009년 돌연 농구계를 떠났다.  최 부회장은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연 매출 3천억 원 규모의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사장으로 시작해 부회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최 부회장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소를 상대로 영업에 나선다. 공장 관리도 소홀한 일이 없다.  한 번의 삶을 살면서 두 차례의 큰 성공을 맛본 인간 최희암이 누군지 궁금했다엠스플뉴스가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는 최 부회장을 만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 최희암 회고 ① “특출나고 지도자 말까지 잘 따르면 최고선수, 이상민이 대표적이었지”에 이어 -1982년 정든 농구 코트를 떠났습니다.  은퇴 후 현대건설 통합 구매실에서 직장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어요. ‘운동선수 출신이 일을 잘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죠. 선수 때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모르는 용어가 있으면 그때그때 묻고 적었습니다. 농구는 멀리하고 일에만 몰두했죠. 그렇게 주어진 일에 적응할 때쯤인 1985년 이라크 파견을 나갔어요.  이라크요? 현대건설은 2년간 국외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야 진급이 돼요. 안 나갈 수가 없었죠.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통합 야적장 창고장을 지내는 등 1년 동안 ‘중동 근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첫 국외 생활인데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낯선 곳이긴 했지만 한국 근로자들이 5천 명 넘게 있었어요. 쉬는 날엔 여기가 한국인지 이라크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웃음). 문제는 업무와 관련한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이었습니다. 남들은 10분이면 처리하는 일을 아무리 노력해도 1시간이 넘게 걸리니까 미치겠더라고.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회사에 손해를 끼치니까 힘들었지. 또 한 가지 힘든 게 있었어요.  어떤 게 힘들었습니까.    이라크-이란 전쟁(1980~1988)으로 바그다드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 전화가 왔어요. ‘희암아, 부인과 애가 한국에 있다. 넌 가장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죠. 아버지께선 학교 선생님으로 제2의 삶을 살길 바라셨어요. 그렇게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죠.  체육 교사를 준비한 겁니까.  준비만 했어요(웃음). 체육 교사로 일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교사를 준비하며 연세대 선수 지도를 도와줬어요. 그러던 중 운명처럼 연세대 지휘봉을 잡게 됩니다. 1986년 3월 김동원 감독님이 물러나면서 연세대를 이끌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학교에서 제안을 했죠. ‘새 감독을 찾을 때까지 팀을 맡아 달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최희암은 뼛속까지 농구인이니까.   연세대 최희암 감독, 한국 농구를 황금기로 이끌다파워볼사이트

1986년부터 17년 동안 연세대학교 지휘봉을 잡은 최희암 부회장(사진 맨 왼쪽)(사진=엠스플뉴스)
1986년부터 17년 동안 연세대학교 지휘봉을 잡은 최희암 부회장(사진 맨 왼쪽)(사진=엠스플뉴스)

감독 대행으로 시작해 17년 동안 연세대를 이끌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오래 할 줄 몰랐어(웃음). 처음 지휘봉을 잡았을 때부터 자신이 있었어요. 휴스턴 교수에게 선진 농구를 배웠고, 은퇴 후 현대건설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이라크에서도 1년 넘게 생활했죠. ‘의사소통 어렵고, 미사일이 떨어지는 곳에서 살아남았는데 뭘 못 하겠나’란 생각이 있었습니다(웃음).    최희암 감독이 연세대 지휘봉을 잡으면서 한국 농구의 황금기가 시작됐습니다.  감독은 좋은 선수를 모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상민, 서장훈, 문경은 등 당대 최고의 선수를 스카우트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었죠.  이상민, 서장훈, 문경은 등은 고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스타였습니다. 개성 뚜렷한 선수를 하나로 만드는 데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선수들을 ‘확’ 휘어잡았지. 선수들에겐 미안하지만 많은 걸 통제했어요. 농구만 생각하는 환경을 만들었죠. 한국에서 최배달로 알려진 무술인 고 최영의 씨가 한 말이 있어요. ‘어떤 동작이든 300번 연습하면 흉내를 낼 수 있다. 3천 번이면 실전에서 몇 차례 써먹을 수 있다. 같은 동작을 3만 번 넘게 반복했을 때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선수들에게 여러 차례 했죠. 실제로 연세대 감독 시절 ‘호랑이 감독’으로 불렸습니다.  제자들을 최고의 선수로 키워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만족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채찍질을 가했죠. 예를 들면 (이)상민이가 5번의 멋진 패스 중에 2개를 득점으로 만들었어. 보통은 2개의 어시스트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난 3개의 실책으로 잃어버린 점수를 봤어요. 그게 패배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  감독 시절 철저한 ‘분업 농구’를 실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선수 구성부터 그랬습니다. 포지션마다 2명 이상의 선수를 두지 않았어요. 경기에선 선수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민이는 리딩과 패싱력이 뛰어나니 포인트 가드 역할만 도맡게 했죠. (문)경은이는 고교 시절까진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지만 3점슛 능력이 가장 좋았어요. 상민이가 경기 운영을 도맡고, (서)장훈이가 골밑을 책임지니 경은이는 3점슛만 책임지게 했죠. 나 또한 감독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어요.  어떤 공부였습니까.  다른 지도자들의 강점을 흡수하기 위해 쉼 없이 연구했어요. 농구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배구의 전설적인 지도자 이창호, 전호관 전 감독님에게 이런 걸 배웠어요. 경기 중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흐트러짐이 없는 겁니다. 이분들은 ‘감독이 연습을 제대로 시켰다면 좋은 결과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봤어요. 실전에서 존재감 없는 감독을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한 거죠.  두 감독을 연구하면서 변화가 있었습니까.  ‘내 임무는 훈련장에서 끝난다’는 생각으로 훈련에 임했지. 선수들은 죽을 맛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생각해도 어느 팀보다 독하게 훈련했거든. 하지만, 코트 위에선 내 감정을 최대한 숨겼어요. 실수가 나와도 박수를 쳤고 많이 웃었죠. 실제로 실전에서 다그치면 더 안 돼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어떤 팀보다 강한 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농구대잔치에서 세 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 가운데 1993-1994시즌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대학팀으론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했죠.     성적도 좋았지만 연세대의 인기, 그야말로 엄청났습니다.  표를 구하기 위해 경기 전날부터 줄을 선 사람이 수두룩했죠. 전국 각지에서 관중이 몰렸으니까. 그런데 이상했어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많은 분의 사랑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불안했어요. 다음 대회에서도 우승할 수 있을까, 이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겠냐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죠. (긴 숨을 내쉬며) 한국 농구의 황금기라고 불린 시기를 단 한 번도 즐기지 못했던 거 같아요.     17년 연세대 감독 생활을 마치고 프로에 도전한 최희암 감독 “‘코치 경험이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많이 한다”

울산 현대 오토몬스,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지휘봉을 잡았던 최희암 부회장(사진=KBL)
울산 현대 오토몬스,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지휘봉을 잡았던 최희암 부회장(사진=KBL)

2002년 연세대 감독 생활을 마무리하고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전신)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건 부회장께선 아마농구 최고의 감독이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KBL에 도전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이전에도 프로팀 제안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절했어요. 당시 한국은 프로화 준비가 안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로보다 연세대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가는 게 낫다고 봤죠. 큰 착각이었더라고(웃음). 대세는 일찌감치 넘어갔어요. 아마추어적인 사고를 일찍 버리지 못한 게 아쉬워요. 아.  아마추어와 프로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특히나 KBL은 외국인 선수 비중이 매우 컸어요. 외국인 선수만 잘 뽑으면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구조였죠. 그런데 외국인 선수 다루는 법을 몰랐어요. 경험이 없었으니까. 또 대학 땐 좋은 선수를 스카우트해올 수 있지만 프로는 아니었습니다. 신인선수 드래프트로 필요한 선수를 뽑고, 트레이드 제도가 있었죠. ‘KBL에서 3~5년 정도 코치 경력을 쌓고 지휘봉을 잡았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웃음).  프로 2년 차 시즌인 2003-2004시즌 초반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학 무대로 향했습니다.  농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2005년 5월부터 동국대를 맡았어요. 연세대를 이끌 때처럼 쫓기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죠. 정상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습니다.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게 아주 좋았어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성적이 나올 땐 성취감이 컸죠.  파워사다리게임

업무를 보고 있는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업무를 보고 있는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동국대 감독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11개월 뒤인 2006년 4월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전신)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전자랜드가 좋은 제안을 해줘서 거절하기 어려웠어요. 프로에서 꼭 한번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도 내려놓지 못했죠. 모비스에서 KBL이 어떤 곳인지 경험한 까닭에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최하위를 전전하던 전자랜드지만, 몇 년간 좋은 선수를 모으면 최고의 팀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3시즌 동안 전자랜드를 이끌었습니다.  우승이란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즐겁게 감독 생활을 했습니다. 구단에선 지원과 신뢰를 아끼지 않았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것 같아요.  – 3부에서 계속 – 관련기사최희암 회고 ① “특출나고 지도자 말까지 잘 따르면 최고선수, 이상민이 대표적이었지”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인터풋볼] 오종헌 기자= 스페인 매체에서 연일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손흥민을 집중 조명했다.파워볼

스페인 ‘아스’는 10일(한국시간) “손흥민은 올 시즌 유럽 대륙에서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손흥민이 해리 케인과 함께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고 이에 토트넘 훗스퍼는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확실히 올 시즌 초반 토트넘의 행보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개막전에서 에버턴에 패한 뒤 10경기 무패 행진(7승 3무)을 달리며 1위에 올라있다. 최근에는 유로파리그에서도 조 1위로 32강 토너먼트 진출에 성공했다.

그 중심에는 단연 손흥민이 있다. 손흥민은 올 시즌 현재 EPL 11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해 10골 3도움을 터뜨렸다. 리그 득점 2위에 올라있고 10월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체력 안배 차원에서 주로 교체로 나섰던 유로파리그 역시 5경기(선발1, 교체4) 2골 1도움을 기록했다.

이에 스페인 매체에서도 손흥민의 뛰어난 활약을 주목했다. ‘아스’는 “손흥민은 단순히 득점에만 전념하는 그런 공격수가 아니다. 그는 직접 창조하고, 혁신하고, 그리고 나서 실행에 옮긴다. 현 시점에서 손흥민은 가장 인정 받을 자격이 있는 공격수 중 한 명이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 매체에 따르면 축구 통계 매체 ‘언더스탯’은 특정 선수에게 창출되는 기회의 여러 요소를 고려해 득점 전환율을 환산하는데 손흥민은 EPL 기준 3.88골의 수치를 나타냈다. 하지만 실제 득점은 10골이기 때문에 기대치보다 2.5배 가량 더 많은 득점을 터뜨린 셈이다.

정상급 공격수들과 비교해도 인상적이다. 현재 독일 분데스리가 득점 1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바이에른 뮌헨)의 득점 기대 수치는 8.5골이지만 총 12골을 터뜨렸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득점 선두인 미켈 오야르사발(레알 소시에다드)는 7골로 득점 기대 수치 6.11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OSEN=이인환 기자] “나는 손흥민을 진짜 좋아한다”.

글로벌 ‘골닷컴’은 11일(한국시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출신 웨스 브라운은 손흥민이 자신의 친정팀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손흥민은 오는 2023년 여름 토트넘과 계약이 만료된다. 지난 2018년 첫 번째 재계약을 맺은 후 병역 문제 해결, 최근 두 시즌 동안 엄청난 활약을 하며 가치가 크게 올랐다. 

이번 시즌 손흥민의 공격력이 정점을 찍고 있다. 현재 리그 10골 3도움으로 도미닉 칼버트-르윈(에버튼, 11골)에 이어 득점 2위에 올랐다. 케인(8골 10도움)과 10골을 합작하며 토트넘의 선두 질주를 이끌고 있다.

이제 한국뿐만 아니라 손흥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대표하는 월드 클래스 선수로 성장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FIFA 베스트 11 후보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맨유서 1999년 트레블에 기여하기도 했던 수비수 브라운은 손흥민에 대해 극찬을 보냈다. 그는 손흥민이 맨유에 있었으면 좋겠다며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이번 시즌 맨유는 홈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토트넘전(1-6 패)서 대패했다. 브라운은 “맨유는 토트넘서 강팀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브라운은 “토트넘전 이후 국제적 휴식기가 맨유에 큰 도움이 됐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토트넘을 좋아한다”면서 ‘특히 손흥민을 정말 좋아한다’라고 강조했다.

손흥민에 대해 브라운은 “나는 진짜 그의 큰 팬이다. 제발 그가 우리 팀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만약 브루노 페르난데스가 좋은 공격수와 뛰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생각해봐라”고 기대했다.

/cmadoo@osen.co.kr

[인터풋볼] 이현호 기자 = 올레 군나르 솔샤르 맨유 감독이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내다본다.

맨유는 13일 오전 2시 30분(한국시간) 영국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시티와 2020-21시즌 11라운드를 치른다. 현재 맨유는 승점 19점으로 7위, 맨시티는 18점으로 8위에 있다.

올 시즌 첫 맨체스터 더비에 앞서 사전 기자회견이 열렸다. 솔샤르 감독은 “맨유 감독이라면 항상 우승을 목표해야 한다”면서 “지난 3시즌 동안 맨유가 아닌 다른 2팀(리버풀, 맨시티)이 우승 경쟁을 펼쳤다. 올 시즌에는 맨유가 달라지리라 확신한다. 특히 새해가 되면 맨유는 더 발전해서 우승 경쟁에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모든 경기에서 이기고 싶다. 그러면 우승할 수 있다”고 다짐했다.

이어 “주중에 치른 챔피언스리그 라이프치히전 2-3 패배로 모두가 실망에 빠졌다. 우리는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젠 맨체스터 더비가 남아있다. 실망적인 경기 후 맞이하는 중요한 경기”라고 말했다.

맨유 공격수 앙토니 마르시알과 에딘손 카바니가 지난 라이프치히전에서 결장했다. 결장 이유는 부상이었다. 솔샤르 감독은 “마르시알은 부상에서 회복해 맨시티전에 뛸 것이다. 카바니도 훈련에 복귀했다. 하지만 출전 여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느덧 솔샤르 감독이 맨유 지휘봉을 잡은 지 2년이 되어간다. 솔샤르는 “맨유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맨유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특히 공격이 활발해졌다. 개인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리그에서 4연승을 달리고 있는데 이 흐름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스포탈코리아] 서재원 기자= 로빈 판 페르시는 아스널을 떠날 당시 엄청난 실망감과 분노를 느꼈다.

영국 ‘더선’은 12일(한국시간) “아스널은 판 페르시에게 남아달라고 설득하면서, 클럽의 재정적 상황을 보여줬다. 당시 판 페르시는 야망이 없는 피터 힐-우드 전 회장에게 큰 화를 냈다”고 보도했다.

판 페르시는 아스널의 얼굴이었다. 2004/2005 시즌에 팀에 합류한 후 8시즌 동안 대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2011/2012 시즌에는 아스널의 정식 주장으로 임명됐고 리그 38경기 30골을 터뜨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판 페르시는 바로 다음 시즌 아스널을 떠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었다.

판 페르시가 아스널을 떠난 이유는 팀에 야망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선에 따르면 판 페르시는 “나는 아스널이 경쟁할 수준에 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언젠가 아스널의 회장이 내게 클럽이 얼마나 (재정적으로) 건강한지에 대한 긍정적인 수치를 보여줬다. 나는 그 때, ‘나는 이따위 숫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원한다’고 그에게 말했다”고 힐-우드 회장과 나눴던 대화를 공개했다.

아스널을 떠난 판 페르시는 맨유 이적 후 꿈에 그리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는 “아스널에서 맨유 이적은 잉글랜드에서 여전히 민감한 주제다. 그러나 나는 우승을 원했다. 단지 우승을 원했다. 때문에 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고 전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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